차 세계 대전이 종전으로 치닫자, 히틀러를 포함한 많은 장교들이 전쟁의 책임을 지고 자살을 택하였지만, 일반 장교나 병사들은 광기에서 깨어나 항복을 하거나 일상으로 돌아왔고 반성했다. 승전국들이 나찌에 협력한 매국노들을 찾아내어 정죄하는 일에 독일은 적극 협력하였다. 패전을 목전에 두고, 일본군의 일반 장교와 병사들은 불구덩이로 뛰어들고 할복을 하였지만, 정작 책임져야 할 지도자들은 항복했고 비겁하게 살아남았다. 일제에 협력한 매국노들을 정죄하려는 노력에 일본인들은 전혀 협력하지 않았고, 오히려 은폐시켰다. 독일은 지도자들이 스스로 앞장서서 정죄받거나 참회했다. 반면 일본의 지도자들은 어리석은 국민들의 뒤에 숨어 목숨을 연명하고 비굴한 명예를 이어 나갔다. 지금 아프간 인질 사태를 앞에 두고 우리나라 개신교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어느 나라를 닮았는가? 물어 볼 것도 없이 바로 비굴했던 일본의 지도자들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지금 많은 국민들과 누리꾼들이 쏟아내는 비판과 성토는 겉으로 보기에는 인질 당사자들을 향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기독교 자체를 공격하거나 기독교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일부 여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과 누리꾼들은 기독교 신앙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평화와 용서와 화해를 말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어찌 그리 자기 잇속만을 챙기고 독선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80%의 비개신교도와 양심을 갖춘 10%의 개신교도들의 오랜 의문과 울분과 반성이 이번 사태에 집약되어 표출되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종교 지도자들의 꼭둑각시가 되어 눈과 귀를 막아버린 일부 개신교도들은 말도 안 되는 변명과 억지 주장으로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그 어리석은 신도들의 강변과 궤변의 뒤에 숨어 여론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인질들의 석방을 위해서 그 어떤 현실적인 노력도 하지 않고 숨기에만 급급하던 자들이, 이제 사태가 해결되자 엄청난 고통 속에 기도하고 도움을 준 것처럼 생색을 내고 있다.

종교 또는 신앙이 추구하는 것은 '절대 진리'이다. 종교가 없는 이들의 거부감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신앙일 수 있는 있고, 신이 신일 수 있는 이유는 '절대 진리'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기본적으로 '신과 섭리의 문제'에 있어 어느 정도 배타성과 독단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리의 절대성'이 종교적인 독단과 아집과 편견으로 변형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종교 집단이 비판받고 쇠락하고 있는 이유 역시 이러한 종교적 독단과 아집과 편견 때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인 '절대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경전'이 세세한 부분까지 일러준다면 좋겠지만, 모든 종교 경전은 전달자인 인간의 한계와 모순을 그대로 보여줄 수 밖에 없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합의되지 못한 '절대 진리'에 대한 이해와 판단이 달리지게 되고, 신앙에 대해 목회자가 개입할 여지가 많아지며, 또 그래서 논쟁과 분쟁이 발생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많은 목회자와 개신교도들은 도대체가 관용이나 타협이라는 것을 모른다. 오로지 불신지옥 예수천국만을 외치면 사람들이 그 절대 명제 앞에 두려워 하고 무릎 꿇게 될 것이라는 안드로메다식 아집에 빠져있는 신앙인들이 너무 많다. 내가 단기 선교(봉사)의 무용론을 지적하자, 상당수 개신교 신자들이 단기 선교를 오랫동안 준비하면서 많은 신앙적 체험을 한다고 반박하였다. 봉사를 자기 자신의 체험을 위해서 하는가?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인가?

지금 대한민국 사회의 종교 집단의 부패와 세속화와 권력화의 자양분을 제공하는 많은 기여자가 바로 어리석은 일반 신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기독교 신자이지만 교회에는 나가지 않고 있다. 나와 알고 지내는 많은 친구들이 나를 교회로 이끌려고 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거의 모든 대한민국 교회는 이익집단화 되었고, 교단의 부패와 부정과 속세화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종교를 밥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종교지도자가 대부분인 현 상황에서는 교회를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 없다.'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가 똑같다. '그건 인간의 잘못이지, 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목사님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사람을 보면 교회를 다닐 수가 없다.' 어느 견해가 옳은 것인가? 나는 개신교 목회자를 맹종하는 신도들의 이러한 성향이 바로 종교 집단의 타락과 부패를 방조내지 종용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착한 남자가 폭력 조직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그 남자는 폭력을 싫어하고 남의 돈을 갈취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여기어 그러한 조직의 행동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외면하였다. 그렇다면 그 남자에게는 죄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그 남자도 범죄자이다. 왜냐하면 범죄 집단에 가입하였고, 가입함으로써 그 집단의 세를 불려주었기 때문이다. 또 물질적 정신적으로 그 범죄 집단에 자기도 모르게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다. 일반 신도들이 종교 집단 내에서 종교가 아니라 신앙에만 천착하는 성향은 결과적으로 종교의 부패와 타락과 독선을 종용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들의 헌금과 기여와 봉사가 종교 집단 내의 암세포를 증식시키는 자양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 개신교도들의 무관심한(?) 맹종과 침묵이 종교인들의 악행과 오만과 타락의 가장 큰 배경이 되고 있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모 방송국 토론 프로에서 한 패널이 현재 대한민국이 해외 봉사(선교) 2위의 대국이 된 것은 젊은이들의 실업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촌철살인의 의견을 내놓았다. 뭐 낀 넘이 성낸다고 교회측 패널은 그 말에 뒤가 쑤셨는지, 말도 안 된다는 반박에만 여념이 없었다. 지금 많은 개신교 선교론자들이 개신교 지도자들의 기업 논리에 의거 해외 선교를 장려하고 있는데도, 어리석은 신도들만 사명감과 봉사라는 단어에 속아 놀아나고 있다는 반증이다. 봉사가 곧 선교이지, 선교가 곧 봉사는 아니다. '믿어라'가 아니라 '사랑합니다, 아파합니다, 그래서 돕겠습니다'를 먼저 말하는 것이 순서에 맞는 것이다.

부동산 거품이 빠지려면 건전한 소비자들이 단합하여 거품이 빠질 때까지 구매를 미루어야 한다. 그리고 소비자들의 이러한 심적인 단결이 현재 부동산 거품을 실제로 붕괴시키고 있다. 마찬가지이다. 종교의 거품과 부패가 없어지려면 종교를 통해 이득을 구하고 권력을 구하는 자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종교 집단에 현혹되거나 참여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논리는 대한민국 교회의 논리일 뿐이다. 그리고 현재 이러한 종교적 책임이 대한민국의 개신교 신도들에게 더 무겁게 요구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나를 포함한 많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종교 집단의 부패상을 자각하였고, 그래서 부패한 종교 집단에 대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기여를 중지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 집단 내에서 신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해외 선교 확대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지만) 덧붙여, 이러한 종교적 현상이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도를 더해 가는 개신교도에 대한 사회적 증오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2차 대전 당시 나찌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 확대와 차별과 학살은 연합군에 속해 있던 여타 유럽 국가들로부터도 심적인 동조를 얻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이 유대인들의 옷에 육각성을 박음질 할 때도 여타 유럽 국가들은 바라보고만 있었다.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는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독일과 다른 나라들이 적이 된 것은 유대인 때문이 아니라 독일의 유럽 지배 야욕 때문이었을 뿐이다. 왜 유럽인들은 유대인을 증오하였는가? 유대인들은 유럽 각국에 얹혀 살면서도 자신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을 고수하였다. 자신들이 속한 터전과 동화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였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장 큰 수혜자였으면서도,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핍박받고 차별받는다는 피해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유럽 사회의 부와 권력을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인 기여와 사회 문제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였다. 다른 민족에 대한 배려와 크리스트교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유럽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뿌리가 유대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이 유대인을 종교적 장자(長子)로 선택하였다는 구약의 정언명제로 인해 기독교 사회 유럽은 유대인을 미워하면서도 쫓아내거나 죽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2천 년 동안의 이러한 잠재적인 증오에 대해 나찌는 그저 불을 붙였을 뿐이었다. 물론 유럽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과 미움이 전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것은 아니다. 유럽인들이 유대인들을 환대하고 포용하였다면 유대인들의 사회적 참여도 높았을 것이다. ( 건전하고 양심적인 개신교인도 꽤 있습니다. 비개신교인님들도 신앙과 신성 자체를 몰아붙이는 것은 자제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야 개신교인들도 더 열린 마음으로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개신교도들이 사회적인 책임과 일반적인 사회 규범에 민감하였다면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무책임하고 무관심해지지 않았을 일이다. 국민들은 개신교도 역시 같은 국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저 참아주고 모른 척 해 주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지난 일이고 이제 고름은 터져버렸다. 그러니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는 그 누구도 공개석상에서 유대인을 비하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여전히 홀로코스트만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팔레스타인 말살에 대해서는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전히 많은 대한민국 개신교도들은 여전히 종교의 자유와 신앙의 절대성만을 말한다. 대한민국 일반 개신교도들이 이제 생각 뿐만 아니라 행동에서 변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보다 더 많이 신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 나의 현실, 나의 신앙, 나의 행복, 나의 부유함에 대한 시선을 우리의 현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행복, 우리의 부유함으로 넓혀야 한다. 기독교가 부당하게 비난받고 공격받는다는 피해의식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개신교 중심의 사회가 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개신교 스스로 '나'라는 껍데기를 깨고 '너', '우리', '책임'에 대해 진지해 질 때 대한민국 사회의 개신교에 대한 증오와 반감은 사라질 수 있다. 비겁하게 신도들의 뒤에 숨어 꼭둑각시 놀음만 일삼는 개신교 지도자들은 참된 목회자가 아니다. 그들은 종교를 이용해 자신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구차하게 연명해 나가려는 바라새인들이다. 더 많은 신앙인들이 이러한 점에 각성하고 참회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천국의 열쇠(The key of the kingdom)는 달콤한 허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뇌하는 양심 속에 있다.

- 탈레반과의 인질 석방 교섭 과정에서 현찰을 직접 전달했다는 여론의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정부가 실제로 돈을 건넸다고 하더라도, 정부로서는 절대로 이를 대놓고 공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 측 역시 같은 방법을 써야 합니다. 공개적인 구상권 행사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가기 전에, 구상에 대한 보상의 형태가 아니라 참회의 형태로 정부에 일정 금액을 기부하거나 세금(목회자 납세 포함)의 형식으로 국가와 국민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합니다. -

 <누구세호>
Posted by 피얼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