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국가대표팀 고참 선수 4명이 2007 아시안컵 대회 기간 중 현지에서 접대부와 술을 마신 사건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 기간에는 SK와 두산 선수들이 빈볼 시비로 몸 싸움을 벌이는 추태를 보였다. 울산과 포항의 K-리그 플레이오프에서는 흥분한 관중들이 운동장에 물병을 투척하였고, 화가 난 선수는 그 물병을 주워 다시 관중석으로 던지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경주에서 열린 하나코오롱 챔피언십 마지막 날에는 날씨 문제로 경기가 중단되자, 흥분한 갤러리들이 선수 휴게실을 둘러싸고 시위를 벌였으며, 선수들을 위협하고 모욕적인 언행까지 퍼부은 일도 있었다. 외도가 발각되어 이혼 소송에 휘말린 한 여자 연예인은, 반성은 커녕 자신의 그릇된 유희의 원인을 배우자였던 남성에게 돌려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치권도 예외가 없었다. 피국감 대상 기관에게 음식과 술 접대를 받은 정치인들의 실상은 우리 사회가 갈 데까지 갔다는 반증이다. 50일 남은 대선 정국 역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도덕성과 전력에 대한 검증의 화살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정치인은 없었다. 오로지 상대방의 잘못을 들추어냄으로써 누가 덜 부도덕한 정치인인가 하는 다툼만을 하고 있다. 국민들 모두가 임기말 대통령의 레임덕을 걱정하였다지만, 대통령을 제외한 정치인들만 도덕적 레임덕에 빠진 이 우스운 아이러니는 무얼까?

 

  2007년 10월은 참으로 부끄러운 한 달로 우리 역사에 남을 것 같다. 지난 한 달 동안 벌어진 이 많은 사건들이 우리 자신의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품격과 품위을 낱낱이 드러낸 슬픈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에는 항상 격(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의 문제에 있어서도 품격의 예외란 없다. 한 사람의 유희가 순전히 자기 능력과 자기 돈과 자기 시간으로 혼자 즐기는 것일지라도 그 유희가 품격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가치있는 것이라고 칭찬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왜 개인적인 유희의 품격을 따져야 하는가? 개인의 유희가 그 품격을 잃고 타락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사회가 품격을 잃고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사회 지도층들이 유희에 있어 품격을 지키는 일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나 연예, 스포츠 등의 문화 분야와 정치, 경제 분야 등의 엘리트들에게서 드러나는 품격은 사회 전체의 수준과 품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밖에 없다. 가장 도덕적이고 건전해야 할 사회 지도층의 유희가 타락하고 품격을 잃기 시작했면 그 사회는 되돌리기 힘든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올 해 초에 있었던 군 장성들의 3.1절 골프 파문은 우리 사회 지배층의 흔들리는 품격과 도덕성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냥 3.1 절도 아니고, 이국만리 타향에서 우리의 소중한 군인이 현지인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날이었다. 국방부와 정부 차원에서 골프를 자제하라고 지시령까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루를 참지 못해 필드로 나간 군 장성들은 그 품격의 높낮이를 떠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시 작전 통제권 환수 결정을 내린 정부에 대해서는 쌍심지를 켜며 태극기와 대한민국을 들이대는 자들이, 정작 자식처럼 여겨야 할 군인의 주검을 두고 유희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배신감과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당사자들은 골프를 친 것은 그저 개인적인 유희일 뿐이었다고 변명했다. 개인적인 유희라?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사회적 지도층이 될 자격이 없으므로 지위를 박탈했어야 했다. 하지만 8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들이 어떤 징계를 받았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유희의 타락'과 '품격 상실'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사회 지배층 유희의 품격 상실' 은 너무나 자주 국민들의 가슴을 찢어 놓았기 때문에 3.1 절 골프 파문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3.1절 이튿날에는 소위 테마 업소라는 기업형 변태 성매매 업소가 당국에 적발되었는데, 단골 손님이라는 자들의 면면이라는 것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법률가, 의사, 대학 교수, 고소득 자영업자, 대기업 간부 등 이른바 '부의 카르텔'을 점령하고 있는 지배층이 단골 명단을 다 채우고도 남았다는 소식에 국민들은 참으로 절망하고 허탈해 할 수 밖에 없었다. 한 사회의 지배층이 진정한 '지도층'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능력'에 더해 '도덕성'과 '품격'이 요구된다. 그러나 '도덕성'과 '품격'을 따지자면 우리나라의 지배층처럼 품격과 도덕성이 떨어지는 집단도 없을 것이다. 도덕성과 품격이 의심되는 인물들이 '능력'이라는 포장지에 둘러쌓여 명품 대통령 감으로 추앙받는 현실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맹자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아도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선비뿐이다. 일반 대중은 생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도적이 되고 사기꾼이 될 뿐, 양심을 지킬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맹자의 말은 완전히 거짓이 된 느낌이다. 생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들의 타락상과 부패 상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오히려 생계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양심을 지키고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굳이 '노블레스 오블리제' 같은 말을 갖다 붙이기도 창피할 따름이다.

 

  지배층이 지도층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요구되는 품격은 어떤 사회에서도 예외가 없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즈 주를 강타하던 그 시간, 크로포드 목장에서 휴가를 즐기던 부시 미국 대통령의 품격과 자질은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서재에서의 철 없는 유희(르윈스키 스캔들) 역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뻔 했던 클린턴의 명성에 치명적인 흠집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을 죽이는 검투를 즐기던, 음식을 삼키지 않고 씹다가 뱉던, 노예를 데려다가 부리고 욕보이던 로마인들의 타락적 유희는 인간사회가 품격을 잃고 멸망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 사회는 사회 전체의 타락과 비역동성으로 인해 지난 수 십 년 간 병들어 있었다. 하지만 국민 전체가 위기 의식을 느끼고 반성하기 시작했다. 일본 열도가 주목하는 '일본의 품격'이라는 서적은 일본인들이 스스로 반성하고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웃 나라는 이제 자신들의 추락한 도덕성과 품위를 되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깊은 타락의 늪으로 빠지고 있으니 걱정이 깊을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지배층 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에 걸쳐 '도덕성의 상실'과 '유희 품격의 퇴행'으로 병들어 가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고질적으로 증가하던 서비스 수지 적자가 드디어 무역 수지 흑자를 압도하고 말았다. 그리고 경상 수지 적자의 주범은 당연히 여행과 송금 수지의 적자이다. 시간이나 허송하고 고작 영어나 배우겠다고 나라 전체의 살림을 거덜내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국가관이 사라진 허영의 바벨탑이다. 일본인들은 여전히 태평양 전쟁의 죄악을 부정하고 있고, 일제 강점기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들이 유독 한국인들에 대해 그토록 건방을 떨고 오만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한국인들의 '자존심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것을 그들이 간파했기 때문이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일본 사회의 속성과 일본에 비굴한 우리의 품격 때문이라는 말이다. 한국인들의 그릇된 품격은 겉으로는 일본인들을 욕하면서, 뒤로는 일본의 상품과 문화를 맹종하는 이중성에서 잘 나타난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한국을 찾는 일본인보다 일본을 찾는 한국인이 더 많아져 버렸다. 그리고 그 이유라는 것이 고작 원화 절상으로 인해 예전보다 많이 싸진 일본의 물가 때문이라는 우리의 품격이 참으로 한심스럽다. 

 

  교육계의 무사안일과 품격의 상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사회는 계층 양극화와 교육 기반의 붕괴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교사들은 교육자는 기업의 사원이 아니고 스승이므로 평가를 받을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교원 평가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의 고매함과 품격을 논하는 교사들의 도덕성과 유희의 품격은 그에 걸맞지 않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회가 양극화로 치닫고 여전히 밥을 굶는 제자들이 즐비한 현실에서,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이 방학마다 해외로 쏘다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가뜩이나 여행수지 적자로 인해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마당에, 방학마다 해외로 나가는 철 없는 교사들이 많은 현실에 학부모와 학생들은 분노한다. 그들의 그러한 품격 없는 유희를 위해 국가와 사회가 두 달이나 되는 방학을 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학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사랑의 매를 들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명제였다. 하지만 진정한 스승다운 교사들이 교단에서 점점 사라지기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나 학부모들 역시 교사의 체벌을 사랑의 매라고 인정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눈 도장이나 찍고 오는 해외 관광, 성 매매 여행, 접대성 골프 관광, 술과 게악질로 찌든 모임, 오로지 먹는 것에만 목을 메는 나들이 등등 지금 우리 사회를 채우고 있는 유희라는 것이 하나 같이 품격이 떨어지는 것들이어서 참으로 걱정스럽고 위험해 보인다. 유희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품격이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국가의 품격이 추락하기 시작했다는 반증이다. 사회 구성원의 절반은 먹을 것을 걱정하고 일자리를 걱정하고 살 집을 걱정하고 있는 데, 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무엇으로 자랑을 할까, 무엇으로 쾌락을 충족시킬까, 무엇으로 재미를 삼을까 하는 걱정만을 하고 있는 이 대한민국의 오늘이 참 추악하고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은 재주가 넘고 재미는 조련사가 본다고 했던가? 국민의 절반 이상이 못쓰고 못입고 못먹어 가며 벌어 모은 재화로, 나머지 집단이 품격 없고 혐오스러운 유희를 위해 탕진하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에 가슴이 아프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는 식의 타강자유(他剛自柔)의 품격 상실이 지금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타인의 잘못에는 좀 더 너그럽더라도 자기 자신의 도덕성과 품위에는 냉정한 타유자강(他柔自剛)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도덕성과 품격을 상실한 자를 우리의 지도자로 세우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Posted by 피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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